서울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기게 내리는 비가 오고 있었다. 옷을 흠뻑 적시지는 않지만, 그저 내가 살아있으며 몸이 약간 축축해졌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비였다 강남가라오케 . 커피숍과 편의점, 끝없이 이어진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 20분쯤 걸었을 때 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젖은 어둠 속에서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그 간판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임을 알리고 있었다. 특별한 계획도, 기다리는 친구도 없었고, 그저 호기심과 무언가 노래해야겠다는 막연한 기분 외에는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곳은 인공적인 레몬 향과 오래된 추억의 냄새가 감도는 세상이었다.
카운터에 있던 여성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1시간, 2시간, 그리고 무제한 이용 요금이 적힌 코팅된 메뉴판을 카운터 위로 밀어주었다. 나는 2시간을 선택해 현금으로 결제했고, 숫자 ’12’가 불에 지져 새겨진 나무 태그가 달린 열쇠를 받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탓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베이스 음과 웃음소리로 진동하는 문들을 지나고, 누군가 발라드를 너무나 열정적으로 불러 가사 사이사이의 숨소리까지 들려오던 방을 지나쳤다. 마침내 12번 방을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아주 작아서 벤치 의자와 테이블, 화면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지만, 그곳은 온전히 나의 공간이었다. 적어도 두 시간 동안은 내 것이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리모컨을 바라보았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된 수천 곡의 제목이 빼곡히 적힌 노래 책은 두껍고 묵직했다. 수많은 선택지에 압도된 채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몇 년 동안 듣지 못했던 노래 하나를 발견했다. 상실과 후회를 노래한 슬픈 곡이었는데, 나는 무심코 그 곡의 번호를 입력했다. 싸구려 음색의 가벼운 MIDI 반주가 시작되었고, 화면에는 세 가지 언어로 가사가 나타났다. 노래를 시작하자 내 목소리는 작고 불안정하게 울려 퍼졌지만, 방 안의 그 무엇도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오랫동안 너무 꽉 조여져 있던 매듭이 풀리듯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했다.
강남의 노래방은 바로 그런 곳이다.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곳.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질문에 답을 주거나 청구서를 대신 내주지는 않지만,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그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방은 숨을 곳이 없을 만큼 좁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을 만큼 사적인 공간이다. 손에 쥔 묵직한 마이크는 내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음이탈이 나거나, 혹은 기계 말고는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내가 고른 노래는 일종의 고백이자, 평범한 대화로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외로워서 사랑 노래를 부르고, 답답해서 분노를 노래하며,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기쁨을 노래한다.
나는 쉬지 않고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부터 난생처음 들어보는 노래까지 불렀다. 남녀 파트를 번갈아 부르며 혼자 듀엣을 하기도 했고,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내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록 음악을 부를 때는 수천 명의 관객 앞에 선 무대 위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냈다. 발라드를 부를 때는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화면에 뜨는 점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숫자일 뿐이었다. 기계는 내가 지난 몇 달간 억눌러왔던 감정을 막 털어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계가 아는 것은 오직 음표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희끗한 머리카락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노래해도 되겠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벤치에 앉아 두 번째 마이크를 집어 들고는 노래를 골랐다. 우리 할아버지가 즐겨 들으셨을 법한, 오래되고 애잔한 느낌의 트로트 곡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불렀다. 거칠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마친 그는 눈을 떠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서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 진실한 것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노래방을 나온 뒤에도 그 순간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그것은 노래방이란 단순히 노래 실력을 뽐내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곳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라도 좁은 방 안에서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생겨나는, 그 묘하고도 친밀한 유대감 말입니다. 강남 곳곳에는 평범해 보이는 문과 깜빡이는 간판 뒤에 숨겨진 이런 순간들이 가득합니다. 이곳을 즐기는 데 거창한 노래 실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꺼이 입을 열어 소리를 낼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혹시 서울에 가게 된다면, 그저 계단을 지나치지 말고 한번 내려가 보세요. 그리고 노래를 부르세요. 바로 그게 핵심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죠.